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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등불 신채호 선생을 만나다.(청원/신채호사당및묘소)

바따구따 2011. 12. 9. 07:00

 

 

민족의 등불 신채호 선생을 만나다.

(청원/신채호사당및묘소) 2011.11.26

 

 

명칭: 단재신채호사당및묘소

소재지: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

지정별: 충북 기념물 제90호

지정일: 1993년 11월 5일

 

안녕하세요! 바따구따 입니다^^

이제는 찬바람도 불고 눈도 내리는 완연한 겨울이 되었습니다.

눈길 안전 사고에 유의하시고 춥지만 몸과 마음은 따뜻한 겨울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 신채호 사당 옆에는 기념관이 있어 선생에 대한 업적과 유품등을 보실수가 있습니다.

 

국 사람이라면 한번즘 들어 봤을만한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단재 신채호 선생.

과연 그 분이 어떠한 일대기를 살으셨는지 이곳 신채호 사당에서 되짚어 봤습니다.

 

1880년 충남 대덕군 어남리 (현 대전 어남동)에서 출생한 선생은 충북 청원에서 성장을 하였고

 본관은 고령이요 호는 일편단생, 단생, 단재입니다.

조선시대 명신 신숙주의 후손으로 아버지 신광식과 밀양박씨 어머니 사이에 두째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 신채호 선생의 영정.

 

25세가 되던해 산동학원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면 이후 성균관 박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황성신문과 대한 매일신보에서

주필로 활약하면서 항일과 민족계몽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 선생이 집필한 책자.

 

1910년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선생은 신민회 동지들과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광복회를 조직하였으며 부회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사 연구에 몰입을 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 많은 역사책을 집필하였습니다.

 

▲ 1990년 추서된 선생의 부인인 박사혜 여사의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좌) 1962년 추서된 선생의 건국공로훈장 복장.(우)

 

1919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를 하였으나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를 하여 공직을 사퇴하였습니다.

1922년에는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 발표하였습니다.

 

▲ 감옥에서 쓰였던 유품.

 

이후에도 항일에 관한 논문과 역사의식 고취를 위한 역사서 등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8년 대만에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 10년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중 1936년 뇌출혈로 순국하셨습니다.

 

 

선생에 대한 성격을 볼수 있는 여러 일화가 있는데 그 중,

 나라를 뺏긴 후에는 허리도 굽히지 않고 세수를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또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투옥이 되었는데 신기선의 도움으로 석방 되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신기선을 '일본의 3대 충노' 라며 민족반역자로 규탄을 하여 공과 사를 엄격히 한 일화도 있습니다.

 

대만에서 일제에 의해 감옥에 투옥되었을때 선생은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해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 할지라도 전혀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 라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이런 일화들은 선생이 얼마나 대쪽같은 성격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임했는지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 선생이 쓰던 편지봉투(좌)와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서한문(1912년)(우)

 

선생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과거의 영웅들이 나라를 구한 '을지문덕전', '이순신전'등을 저술하였으며,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하는 등

 우리역사의 민족사관을 확립하고 근대사학을 수립하였습니다.

 

▲ 1978년 건립된 선생을 모신 사당. 단재영당 또는 단재영각으로 불립니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때 일본의 호적령에 이름을 올리수 없다하여 신고를 거부 하였고

 결국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오늘날까지 무국적 상태였다고 합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땅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대조적인 아픈 현실인데

다행히도 선생의 후손들이 노력한 결과 2009년 국적을 회복 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중차대한 일에 왜 나라가 나서지 않는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 사당의 뒷편에는 선생이 어린시절 보낸 집터위에 선생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업적이나 영향에 대해서 담기에는 지면도 짧거니와

그 많은 내용을 다 헤아리지 못해 간략히 올려 봤습니다.

선생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던 중 상고사와 같은 역사서는 현재까지 논란이 있지만

 중국과 일본의 관점이 아닌 자주적인 민족사학 관점에서 쓰셨다는 점은 큰 업적임은 분명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단지 역사책을 쓰고 교육하는 것을 너머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를 알려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 힘을 키워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은 우리가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것 같습니다.

이곳 신채호 선생의 사당 및 묘소에서 그분이 품었던 숭고한 뜻을 이어 가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이상 바따구따였습니다.

 

※ 여행 tip !

▷ 입장료 및 주차료는 없습니다.

▷ 전시관 관람시간은 하절기는 9시부터 18시까지 동절기는 17시까지 입니다.

▷ 주변 관광지로 미동산 수목원, 운보의 집 등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043)251-3286 (사당관리사무소)

 

 

 

 

참고자료: 안내문,  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