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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평생을 몸바치신 선생의 뜻을 기리며!(서천여행/이상재선생생가)

바따구따 2011. 11. 5. 08:00

 

 

독립운동에 평생을 몸바치신 선생의 뜻을 기리며!

(서천여행/이상재선생생가) 2011.10.23

 

 

명칭: 이상재선생 생가지

소재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외

지정별: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

지정일: 1990년 12월 31일

 

  여행 tip!

▷ 입장료 및 주차료는 없습니다.

▷ 주변 관광지로 한산모시관, 한산소곡주 등이 있습니다.

▷ 자세한 문의사항은 041)950-4225 (서천군청 문화관광과)

 

 안녕하세요! 11월의 첫째 주말에 바따구따 인사드립니다.^^

오늘 보실 내용은 충남 서천군에 위치한 "이상재선생 생가"가 되겠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생가와 바로 옆에 위치한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독립운동가이신 이상재 선생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노트와 펜을 준비하여 중요한 부분은 메모해 가면서 그럼 바따구따와 함께 둘러보시죠!

 

▲ 입구에서 왼쪽길로 가면 생가, 오른쪽으로 가면 전시관이 나옵니다.

 

이곳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로서 옛 한산 8경 중 건지산, 일광재, 오라릿돌 등 3경을 조망하는 경관촌입니다.

 백제, 신라때는 마산현에 속하였고 고려때는 한산현에 속하였습니다. 구한말에 이르러 한산군 북부면

 지역이 되었는데 지형이 종지를 닮아서 종지울 또는 종지동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지(種芝)의 뜻이 뭔지를 모르겠네요? 혹시 아시는 분 손!!

 

▲ 생가 옆에 위치한 이상재선생 전시관.

 

전시관은 1991년에 개관되었으며 이상재 선생의 유품등을

관람할 수 있게 하여 선생의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 월남 이상재 선생.

 

자~ 그럼 이상재 선생은 과연 누구인가? 먼저 대략적으로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본관은 한산, 호는 월남이고 1850년 11월 21일 이곳 종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이색선생의

16대 자손이 되겠습니다. 가난한 선비의 맏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후에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치하 때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민중계몽에도 앞장 섰습니다.

1927년 타계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을 치루어진 인물이며 종교가이자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 이었습니다.

 

▲ 선생의 친서와 기독교 관련 책.

 

한산에서 '목은 선생이 재현하였다' 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글 잘하는 소년 이상재는 혜산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고 1867년(고종4년) 열여덞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비리로 얼룩진 과거시험에 낙방하게 되었습니다.

 부패한 나라와 기우는 조국에 대해 탄식하던 중 박정양 승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 선생이 사용하였던 유품과 1962년에 내려진 건국훈장.

 

박정양 승지가 1881년 일본으로 시찰단으로 갈때 수행원 역할로 다녀와서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하였습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새로운 문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1898년에 서재필 박사와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 개혁당 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크리스찬이 되었으며 그 후

헤이그 밀사 파견 준비 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태어난 생가의 모형.

선생이 남긴 저서로는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습니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의 회장이 되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후

 소년 연합 척후대(보이스카웃)의 초대 총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단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의 투쟁 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에 추대되었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셨습니다.

 

▲ 박정양 주미공사 일행 (좌측, 원부분이 선생), 개혁당 사건으로 옥고중인 선생(우측, 원부분이 선생)

 

 ▲ 아들 이승준에게 보낸 편지.

멀리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아들에 대한 염려와 가족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선생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걱정 등을 엿볼 수 있는 편지였습니다.

 

▲ 선생이 돌아가실때 쓰여진 여러 만장 중 하나

족손 만규라 쓰여진 것으로 봐서 손자뻘 되는 이만규라는 분이

 올린 애도글로 비통함과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습니다.

 

▲ 이상재 선생의 장례 행렬

 1927년 선생이 타계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전 국민이 슬픔속에 빠졌습니다.

장례열차는 경성역에서 군산까지 가는 동안 정거장마다

 장송하는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음은 사진에서 봐도 알수 있었습니다.

 

▲ 이상재 선생 생가 전경. 왼쪽에 솟을대문과 중앙에 사랑채 그리고 오른편에 우물이 보입니다.

 

 이상재 선생에 대해 알았으면 이제 전시관을 나와 생가를 둘러 봅시다.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초가로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 경에 지어졌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 없어졌다고 합니다. 현재 보이는 건물은 1972년부터 2010년까지 복원한 것입니다.

생가가 상당히 깨끗하고 최근에 지어진 느낌을 받았는데 최근까지 복원공사를 하였던것 이었군요.

 

▲ 대문안쪽에서 바라본 사랑채.

 

위에서 언급한 박정양 승지와의 인연은 곧 독립운동가로서의 발판을 이루게 되었는데요.

그 박정양 승지가 선생에 대해 감화한 일화가 있답니다.

 한번은 선생이 서로 짝이 다른 버선을 신고 집안을 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이에 이상하게 여긴 박정양이 그 이유를 물으니..

"객지에서 지내는 사람이 별 수 있겠습니까? 우선 많이 떨어진 쪽부터 갈아 신었지요." 하시니

"허~ 그것참 질문보다 대답이 걸작일세 그려"라 답하였습니다. 박정양은 선생의 대답이 엉뚱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어서 크게 웃었습니다. 이는 겉치레를 개의치 않는 선생의 솔직함과 대담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박정양은 이에 가슴에 와 닿았으며 깊이 감화하였다고 전해집니다.

 

 ▲ 대문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안채.

 

 ▲ 사랑채에서 바라본 안채

 

이상 이상재 선생의 생가에서 선생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에 대한 업적이나

활동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 포스팅에 다 담지는 못하고 간략하게만 올려봤는데 그래도 보시기에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한 평생을 우리나라의 독립민중 계몽을 위해 헌신하신 이상재 선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날 존재 한다는 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또한 선생의 숭고한 뜻을 이어 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라는 점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를 하나 더 소개 드리며 마치겠습니다.

마지막 문구는 이 포스팅의 주제이기도 하고 오늘날에도 그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입니다^^

 

루는 조선미술협회라는 단체가 성립되어 선생이 그 자리에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식장에는 통감 이또 히로부미를 비롯 이완용과 송병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제에 붙어 나라를 말아 먹은 자들과 만나니 선생은 그냥 지나칠리 만무했겠죠?

선생이 말씀하시길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두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고 있는데 선생은 말씀을 이어

 

"대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면 일본도 망할게 아니겠소!"

 

 

 

 

참고자료: 안내문, 문화재청, 서천군청,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