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 충청남도 구경

성삼문의 묘가 논산에 있는 까닭은? (논산 성삼문묘)

바따구따 2011. 8. 16. 10:42

성삼문의 묘가 논산에 있는 까닭은?

2011.8.4

 

 

명칭: 성삼문의 묘

소재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

지정별: 충남 문화재자료 제81호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입장료 및 주차료는 없습니다.

▷편의시설로는 주차장과 화장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세한 문의 사항은 041) 730-3226 (논산시청 문화관광과)

 

 

 

 

 

 

 

 

 

▲ 묘소 앞 성삼문의 사당.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3번 묻는 소리가 들려

 매죽헌 성삼문(1418∼1456년) 선생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하고 3번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1438년(세종 2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1447년(세종 29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때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와 함께 이를 도왔고,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13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여 한글 반포에 공로가 많았다.

 

▲ 묘소 입구의 하마비.

 하마비란 '이곳은 신성한 곳이므로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 라는 뜻이 담긴 일종의 알림판이다.

 성삼문의 묘를 이곳에 쓴 후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면 말다리가 부러지거나 말을 탄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 났는데 하마비를 세우고 말에서 내려 걸어 다니게 하였더니 이후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하마비의 건립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묘소 입구의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

성삼문의 신도비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은 아래 박철희 선생님의 댓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 묘소로 가는 길.

 입구에 있는 사당 왼편에는 묘소로 올라가는 길인 신도가 있다. 

 

충신 그리고 사육신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세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성삼문은

아버지인 성승, 박팽년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한강에서 거열형에 처해진다.

 시신을 전국의 산하에 매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다리가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지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거열형이란 사지를 우마가 끄는 수레에 묶은뒤 달리게 해 사지를 찢게하는 극형 중의 극형을 말한다.

이 잔인한 형벌은 고대 중국으로 부터 전해지게 되었고 주로 대역죄인들의 처벌에 집행되었다.

 

▲ 성삼문의 묘소.

 

성삼문의 묘가 논산에 있는 까닭은?

(지금까지 알려진 전설을 써봅니다. 자세한 역사적 기록은 더 공부해봐야겠습니다.)


 성삼문이 거열형을 당하여 찢겨진 육신이 팔도에 조리 돌려질(죄인을 끌고 다니며 망신시킴)때 한쪽 다리가 고개를 넘게 되었다. 

시신을 운반하던 사람이 귀찮은 생각에 독설을 내뱉자 어디선가 '아무데나 묻어라.'라는

소리가 들려 지게꾼은 그 길로 달아났고 근처 선비들이 나서서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 성삼문 묘의 비석. 오랜시간 풍화로 인해 훼손이 심해졌다.

 주변의 상석, 문인석, 석주등은 최근에 제작하여 배치하였다.

 

이 지역 유림들은 매년 10월 그믐에 묘 앞에서 묘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 묘에서 바라본 탁트인 전경.

 

묘소 입구에는 관리하시는 분이 거주 하는 것 같은데 이때는 부재중이라 뵐수가 없었다.

 

 

 성삼문이 논산지역에서 학문을 연구하거나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성삼문의 묘소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후대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며,

성삼문의 절개와 지조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참고자료: 안내문, 논산의 문화재, 문화재청, 논산디지털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