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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여행/위봉산성) 태조 이성계 어진의 피난을 목적으로 축조된 산성

바따구따 2011. 8. 1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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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여행)

위봉산성

"태조 이성계 어진의 피난을 목적으로 축조된 산성"

2011.8.6

 

 

명칭: 위봉산성

소재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675

지정별: 사적 제471호

지정일: 2006년 4월 6일

 

※ 여행 tip 

 

▷입장료와 주차료는 없습니다.

▷주차장이 따로 없기에 도로 한켠 공터에 세워야 합니다.

▷주변 관광지로 위봉폭포, 위봉사, 송광사등이 있습니다.

▷문의전화는 063) 240-4226 (완주군 문화관광과)

 

송광사를 지나 위봉폭포를 찾아 가던 중 위봉산을 올라가는 도로 양옆으로 오래된 성벽이 보였습니다.

이정표를 보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위봉산성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냥 지나 칠수는 없죠. 차를 도로 한켠 공터에 세우고 구경을 시작했습니다.

 

▲ 위봉산성 전경.

1675년(숙종 원년)에 쌓은 것으로 둘레가 약 16Km에 이르는 규모로 유사시 전주 경기전과 조경묘에 있는 태조의

초상화와 위패를 피난시키려 성을 쌓았다. 실제로 동학 농민봉기때 전주가 함락되자 어진과 위패를 이곳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7년의 세월동안 인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해진다.

 

▲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어진.

성을 축조한 주된 목적은 방위보다는 바로 이 어진를 유사시 대피시키려 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안에는 어진과 위패를 안치하는 행궁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헐려 없어졌고,

'완산지'(지리지의 하나)에서 행궁은 '영정이안소'라고 밝히고 있어 위봉산성의 특징과 목적을 알 수가 있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성문이 보이고 위로는 산책을 위한 둘레길이 나옵니다.

 

성문 안쪽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비석들이 있습니다.

 

▲ 성의 서쪽에 있었던 성문

본래 3층의 문루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수 없고 석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위봉산성은 동서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의 높이 3m, 너비3m의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다.

 

▲ 성문을 보호하려 쌓은 옹성

문헌비고에 기록된 위봉산성은 "전주동쪽 40리에 있고 성벽의 둘레는 5천97파(길이)이고 여첩(성위의 담)은 2천437이요.

 성안에는 45개의 우물, 웅덩이는 9개를 숙종원년에 쌓았다"고 했다

 

 

▲ 복원된 성벽

완주군이 지난 1994년부터 1억 2천여만원을 투입해서 방치되었던 위봉산성 서문지를 복원하고

주변성곽 16km는 연차적으로 7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보수 및 복원키로 했다.

그 복원 사업의 결과로 축조 당시의 성벽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성벽에서 바라본 풍경.

시원하게 뻗어 있는 위봉산의 산줄기가 보입니다.

오른편 도로 앞쪽으로 내려가면 송광사가 나오고 뒤쪽으로 올라가면 위봉사, 위봉폭포가 나옵니다.

행궁의 수비를 위하여 산성안에 사찰을 짓는 예가 많았는데 위봉사도 산성과 행궁을 지키기 위해 동시에 건물을 세운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했을 때 전라감사 김문현은 경기전 영정과 조경묘 위패을 피난시킨다는

 핑계로 받들고 와서 승려에게 맡겨놓고 공주로 도망친 일이 있기도 하였다.

 

 평소 알고 있기로는 성벽은 외세의 침략을 대비할 목적으로 쌓는데요.

이곳 위봉산성은 다른 목적인 어진과 위패를 대피할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조선 왕조의 뿌리인 어진과 위패가 얼마나 중요시되고 신성시되었나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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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안내문,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완주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