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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행/풍패지관) 풍패지관 현판에 담긴 이야기

바따구따 2011. 8. 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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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행)

풍패지관

"풍패지관 현판에 담긴 이야기"

2011.7.31

 

 

 풍패지관 (전주객사)

소재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3가 1

지정별: 보물 제583호

지정일: 1975년 3월 31일

※입장료는 없습니다. 주차장은 별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뒷쪽 골목길에 세웠습니다.

전주객사에서 풍패지관으로 정식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문화재청-

이 포스트에서는 두 용어를 혼용하여 썼습니다.

 

 

 

 

 

객사라함은 말 그대로 손님이 묵어간다는 뜻의 건물입니다.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묵어가던 곳이죠.

객관이라고도 불리었고 역사를 보자면 고려시대 초기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객사에 전패(임금을 상징는 패)를 모시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향망궐배라 부르죠.)

 

▲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면 만나는 '호남제일문'

 길이 40여미터의 호남제일문은 1994년 만들어졌고 현판은 故 강암 송성용선생의 글씨입니다.

호남제일이라는 글귀와 웅장한 대문에서 전주의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전주 풍패지관은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1471년(성종 2년)에

 서익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객사에는 진남루라는 주관과 그 양측에 매월당, 청연당의 두 익헌이 있었고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주관과 양익헌, 수직사만이 남아 있습니다.

 

▲ 중앙 정당(주관) 모습

1900년대 초에는 전라북도 상품진열소, 일제강점기에는 산업장려관,

한국전쟁 후 전북대의 전신이 명륜대학 강의실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들어와 정비 및 복원 사업을 통해 본래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 서쪽 익헌 모습 (=서익헌, 서익사, 서익실)

 

▲ 동쪽 익헌 모습 (=동익헌, 동익사, 동익실)

일제 강점기에 남문에서 북문을 잇는 도로 개설시 동익헌 일부가

 잘려 나가면서 초석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99년에 복원을 하였습니다.

 

풍패지관 앞에는 객사를 관리하던 사람들의 거처인 수직사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누구나 풍패지관을 볼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이 이 커다란 현판일 것입니다.

크기가 가로 약 5m, 세로 약 2m이며 초서체로 쓴 글씨에는 힘이 넘치고 호쾌한 느낌이 듭니다. 
여기서 '풍패'의 뜻은 한(漢)나라의 고조 유방이 태어난 패읍 풍현(또는 패주 풍읍이라고도 함)

지명에서 유래된 말로 왕의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풍패지향이라고 하죠.)

전주는 바로 조선왕조의 성씨인 이씨의 고향이죠.

또한 이 풍패라는 말은 전주에서 풍남문, 패서문(현재 없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왕의 고향에 있는 관아 건물이다' 이런 뜻이 되는 셈이죠.

그렇다면 누가 이 웅장하고 호쾌한 글씨를 썼을까요? 그 주인공은 중국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인 주지번의 글씨입니다.

여기서 또 생기는 의문 '그렇다면 중국의 사신이 왜 여기에다 현판의 글씨를 남겼을까요?!!'


표옹 선생과 주지번의 만남 그리고 인연

 

 

표옹 송영구 선생은 1593년에 송강 정철 선생의 서장관 자격으로 중국 북경을 갔습니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의 숙소에서 불을 지피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과거를 보러 북경에 왔는데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여비가 떨어져서 일를 하고 있었던 중 이었습니다.

 표옹선생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을 필사하여 주고 용돈까지 주었습니다.

 그후 이 청년은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습니다.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외교사절단의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국빈 중의 국빈인셈이죠.

그러한 주지번이 한양에서 전라도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20여전의 표옹선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풍패지관' 현판은 당시 익산에 살고 있던 표옹 선생을 만나러 한양에서

 내려 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들렸다가 기념으로 써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주mbc특집프로를 보니 표옹 선생의 후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주지번의 후손들을 만나기 위해 언론매체를 통하여 수소문 했는데 결국 못 찾았다고 합니다.

400년을 뛰어넘는 인연이 못 이루어진 점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국경과 민족을 넘는 의리가 담긴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 들어도 훈훈해집니다.

아니 오히려 각박해진 현대사회에서 본보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전주의 객사인 이 곳 풍패지관에서 400년전의 소중한 만남과 인연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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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안내문, 문화재청, 전주mbc(풍패지관 400년의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