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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유적) 가야시대 생활상 속으로

바따구따 2011. 7. 8. 00:53

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시대 생활상 속으로"  2011.6.16

 

 

 

 봉황동 유적

소재지: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외

지정번호: 사적 제 2호

지정일: 2001년 2월5일

 

 

 

 

※입장료는 무료이며 주차요금은 1시간 무료입니다.

유적지 한바퀴 도는데 도보로 1시간 가량 소요됩니다.

 

 

엇을 보러 온것도 무엇을 찾으려 온것도 아닌 생각으로 산길에 몸을 맡긴채 걷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걷는 곳곳에 보이는 복원된 가야시대 유적을 보면 어느새 과거로의 여행이 된 듯 싶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 발굴지로 가야의 실체를 밝히다!

 

 

 봉황동 유적지은 우리나라 1~4세기경 철기시대인 가야의 유적이 발굴된 지역으로

 동서의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이루어져 있으며 봉황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907년 국내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패총(사적 제2호)과 봉황대유적(옛 경남 문화재자료 제87호)이

 성격의 동일한 유적이어서 통합을 하여 2001년에 사적 제2호로 확대 지정되었습니다.

 

금관가야의 중심 유적으로 1907년부터 현재까지의 여러 발굴조사의 성과를 통해

 당시 생활상, 사회상, 국제관계 등 그 실체를 보다 명료하게 밝혀낸 유적지입니다.

 

 

 ▲복원된 망루

높이 약 10m로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하였을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복원된 고상가옥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용도로 지어졌습니다.

 지면보다 높다는 점은 짐승과 습기, 침수등으로 부터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원된 수혈 주거지

 

가야시대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입니다.

 

 

▲ 복원된 가야의 배

가야시대의 배는 아직까지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배를 본떠 만든 배모양의 토기로 구조나 형태등을 짐작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기마무사상

국보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특징은 무사뿐만 아니라 말에도 철제 투구와 갑옷을 입혀 보호하고 있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슬픈 전설을 가진 '황세바위'

봉황대 윗편으로 가다보니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데 이 바위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안내문의 내용을 참고로 살짝 편집해 적어 봤습니다. 시간 나실때 읽어보세요.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숙왕)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결혼시키기로 약속했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무튼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오줌 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였다. 이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이 곳 황세바위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현재 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수 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약혼을 하였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는 황세를 그리워하며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를 그리워하며 여의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현재 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있다.

애초부터 출정승이 아들이라고 거짓말만 안했어도 해피엔딩이었는데 말이죠.

 

 

 ▲ 패총유물이 출토된 봉황대 구릉의 동남단쪽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 골각패제품(칼, 장신구 등),

국제교류와 관련한 중국계유물(화천(※중국 신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 청동경),

일본계유물(야요이토기, 하지키) 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생활과 관련한 탄화미, 동물뼈, 조개껍데기 등 다양한 자연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 사회상, 국제교류의 연구에 큰 이바지를 하였습니다.

또한 패총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으며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회현리패총 유적은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1907년)로 발견된 유적으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패총 전시관

 

 

 

▲전시관 내부

전시관 내부는 발굴면을 그대로 전시하였는데 패총(貝塚:조개무덤)답게 어마어마한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아쉬운점은 1907년 최초로 발견하고 발굴한 사람은 국내 학자가 아닌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발견으로 인해 가야의 실체가 좀더 명확해지고 구체적 됐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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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안내문, 김해시청, 문화재청